논둑길, 밭고랑 – 기억 속 시골의 풍경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란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맨발로 논둑길을 뛰놀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발바닥엔 흙이 닿고, 무릎 아래엔 풀잎이 스치며, 그 길은 단순한 통로가 아닌 추억의 배경이자 삶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논둑길과 밭고랑은 급속한 농촌 변화 속에서 하나둘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천후 농기계 도입, 대규모 정비, 콘크리트 포장 등으로 자연스러웠던 시골 길의 풍경도 바뀌고 있습니다.
논둑길이란 무엇인가?
논둑은 논과 논 사이, 혹은 논과 밭 사이에 만든 좁고 길게 솟은 길입니다. 농부들은 이 논둑길을 따라 이동하며 모내기, 김매기, 물 조절 등의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논둑 위는 물꼬를 트고 막으며 물 흐름을 조절하는 핵심 통로였습니다. 논둑을 따라 걷는 일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농사의 일부였던 셈이죠.
밭고랑과 두둑 – 작물의 삶터
밭고랑은 밭에서 작물의 뿌리가 썩지 않도록 배수와 통풍을 위해 파 놓은 홈입니다. 고랑 사이의 높아진 부분을 ‘두둑’이라 부르며, 여기에 고추, 감자, 고구마, 콩 등의 작물을 심었습니다.
밭고랑은 비가 오면 작물의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했기에, 농부들은 매일 아침마다 고랑을 살피고, 막힌 곳을 뚫고, 무너진 두둑을 다시 다듬었습니다.
사라지는 농로, 남겨지는 기억
요즘 농촌에서는 트랙터와 콤바인이 쉽게 다닐 수 있도록 논과 밭 사이를 넓고 반듯하게 정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작업 효율은 높아졌지만, 예전의 굽이진 논둑길, 자연스러운 밭고랑의 형태는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시멘트로 덮인 농로는 더 이상 아이들이 뛰놀 수 없는 공간이 되었고, 자전거 바퀴에 흙이 묻던 정겨운 풍경도 이제는 보기 힘듭니다.
논둑길 위에서 펼쳐졌던 삶
논둑길은 그 자체로 시골 사람들의 삶터이자 놀이터였습니다. 어머니는 논둑에 쭈그리고 앉아 풀을 뽑았고, 아이들은 개구리를 쫓고, 나비를 잡고, 어르신들은 그 길을 따라 마을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논둑은 시골의 골목이자 이웃과 소통하는 장소였습니다. 그 좁은 길 위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쉬고,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밭고랑을 따라 흐르던 계절의 흐름
밭고랑 사이로 흐르던 빗물, 고랑 옆에 피어난 민들레와 냉이, 그리고 고랑 끝에서 장화를 씻던 아이들의 웃음. 밭고랑은 계절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삶의 흐름이었습니다.
감자를 캘 때마다 고랑을 뒤지던 기억, 고구마 줄기를 자르며 햇살에 눈을 찡그리던 풍경… 모두가 사라져가는 고향의 풍경</strong 속에 남아 있습니다.
왜 시골의 길을 지켜야 하는가?
우리는 농업의 효율성을 높이며, 기계에 맞춰 길을 만들고, 땅을 편편하게 다듬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과 자연이 함께 만든 길의 기억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논둑길과 밭고랑은 단순한 길이 아닌 문화의 흔적입니다. 조상의 삶, 공동체의 방식, 자연과의 조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합니다.
맺으며 – 발길은 사라졌지만, 마음은 남는다
이제는 많은 논둑길이 정비되고, 밭고랑도 기계의 바퀴에 맞춰 바뀌었지만 그 길을 기억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시골의 진짜 풍경은, 길 위에 묻어 있는 이야기들 속에 있습니다. 논둑길을 따라 걷는 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시골이 걸어온 시간 위를 함께 걷는 일입니다.
사라진 길 위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그 길을 걷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마음으로 답합니다. “그 길은 여전히 우리 안에 살아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