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초입에 서 있는 수호자들
한국의 전통 마을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나 들판 한켠에 우뚝 서 있는 장승과 솟대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마을을 수호하고 재앙을 막는 신앙의 상징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나무에 새긴 사람 얼굴 하나, 장대 위에 얹힌 새 한 마리가 수백 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것입니다.
1. 장승이란 무엇인가?
장승(長丞)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사람 형상의 수호신입니다. 주로 마을 입구, 사거리, 고갯길 등 경계 지점에 세워졌습니다.
장승의 기원은 명확하진 않지만,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국가와 민간 모두에서 활용되었습니다.
- 국장승: 관청에서 세운 장승. 도로 경계, 군사 목적으로 활용
- 민속장승: 마을 주민이 세운 수호신 겸 신앙 대상
보통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등 이름이 새겨지며 남녀 한 쌍으로 설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솟대는 어떤 존재인가?
솟대는 장대 위에 나무로 깎은 새(주로 기러기)를 얹은 조형물입니다. ‘솟아 있다’는 의미에서 솟대라 불리며, 주로 마을의 당산제 또는 풍년기원제 때 기원의 상징물로 세워졌습니다.
솟대의 새는 하늘과 신을 연결하는 영물로 여겨졌으며, 장승과 달리 남성 중심 문화 외에 여성적 기운을 함께 담고 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 풍요 기원: 농사와 물길의 순조로움 기원
- 질병 퇴치: 마을 질병 예방과 장수 염원
- 마을 상징: 솟대 수와 배치로 마을 규모, 전통 표시
3. 장승과 솟대가 서 있는 이유
왜 이들은 마을 입구에 자리잡았을까요?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마을의 ‘경계’는 사람과 자연, 안과 밖, 익숙함과 낯섦이 교차하는 지점입니다.
- 외부 재앙(질병, 악귀, 도적 등) 차단
- 공동체 경계의 표시
- 방향 안내 또는 풍수지리적 안정
장승은 그 위엄으로, 솟대는 그 높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상징하며 마을의 정체성과 안전을 나타냈습니다.
4. 조형물 이상의 의미
장승과 솟대는 단순한 나무나 돌이 아닙니다. 그 속엔 민중의 바람과 삶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 장승의 얼굴: 무표정, 분노, 웃음 등 다양. 마을의 분위기 반영
- 솟대의 새: 기러기, 학, 까치 등 지역별 상징 다양
- 문구와 새김: 마을 이름, 수호 목적, 제사 날짜 등 기록
장승을 만든 이는 보통 마을의 장승장(匠) 또는 목수였으며, 제를 올리고, 안치를 마친 후엔 마을 전체가 정성껏 돌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5. 장승제와 솟대제
장승과 솟대는 해마다 제례(祭禮)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 정월 초하루: 마을 대표들이 제물을 차려 제례 지냄
- 당산제 연계: 마을 수호신을 함께 모시는 큰 제사
- 놀이 요소 결합: 제사 후 풍물놀이, 씨름, 줄다리기 등 개최
제례를 통해 주민들은 공동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확인하며 장승과 솟대를 중심으로 정신적 중심축을 형성해갔습니다.
6. 사라지는 전통, 다시 살아나다
산업화 이후 마을이 해체되며 장승과 솟대도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지역 문화자산으로 복원되며 새롭게 조명받고 있습니다.
- 서울 강서구 허준근린공원 – 전통 장승거리 조성
- 전북 진안 마이산 – 솟대 테마파크 운영
- 강원도 정선 – 장승장 양성과 마을 행사 연결
교육용 체험, 축제 전시, 관광 자원 등 장승과 솟대는 여전히 사람을 모으고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맺으며 – 지금도 마을을 지키는 이들
조각된 얼굴, 깎아낸 새, 정성으로 세운 장승과 솟대는 단지 옛 풍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하나로 뭉치고, 자연과 공존하던 시대의 상징입니다.
현대의 도시에서도 우리는 마음 한켠에 장승 하나, 솟대 하나쯤 세워 삶의 균형과 방향을 되찾고 싶은 건 아닐까요?
다시 마을로 가보면, 조용히 서 있는 장승 하나가 여전히 그 마을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